박열’이라는 아나키스트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1919년 3 ․ 1운동때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였고,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에는 ‘가네코후미코’라는 일본의 여류 아나키스트와 부부관계를 가지기도 했고, ‘가네코후미코’와 함께 그는 일왕의 폭살을 죄목으로 사형을
Ⅰ. 서론
종래의 통설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병이전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790명 정도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최근의 김영달, 산협계조의 [近代日本の外國人勞動者問題]에 의하면 한일합병이전부터 꽤 많은 수의 조선인이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다. 1880년대 이후 탄광노동자, 철도공사 노동자, 행상인 등
Ⅰ. 서론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은 18-19세기에 이르게 되면서 그 적용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1870년에 이르러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한 독일의 통일은 기존의 유럽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산업혁명의 발생으로 기존의 생산방식이 바뀌게 되면서 기존의 유럽 열강들에게 자신
한국근현대사연구』26),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64), 한국인의 식민지 경험과 근대 주체 형성(『역사문제 연구』11) 등 금융 부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첫째, 일제강점기 한국에는 ‘통일된 금융시장권’이 형
한국 아나키즘운동사」에서는 흑로회가 1923년 2월 21일 이강하 외 10여명이 이강하를 중심으로 의주통에서 조직되어 천도교 강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경찰의 단속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흑로회는 박렬이 일본에서 일시 귀국하여 동지를 규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