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토탄층에서도 볍씨가 발견되었다. 또한 청원 소로리 구석기유적에 대하여 방사성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1만 3000~1만 4800여 년 전에 형성된 유기질 점토층에서는 고대 벼가, 1만 7300여 년 전 토탄층에서는 유사벼가 각각 발견되었다. 이 소로리 볍씨는 DNA 분석 결과 현재의 벼와 유전적 유사성은
시 피나는 노력으로 농사의 광작을 벌이는 데 힘써 부자가 된 실례의 하나로 보인다. 그리고 소작인들이 지주인 허 공에게 인정을 쓰는 모습을 통해 광작으로 인해 소작농들은 농사지을 땅을 구하기가 어려워 진 당시 사회의 단면도 볼 수 있다.
3. 상업의 변화
조선은 초기 고려시대에 비해 상업 활
조선 후기의 인구 증가가 생산성 증대에 한 바탕이 되었다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기술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은 이앙법의 보급이다. 이앙법은 농업노동력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대시킨다. 지금은 논농사라면 당연히 이앙법을 한다고 생각되지만, 이 방식은 수리시설 확충이 전제되지 않으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17세기말, 18세기 초에는 논농사의 파종법이 종래의 직파법에서 이앙법 대체됨에 따라 노동력을 줄이고, 이모작이 가능해져 벼의 수확량이 배가되었다. 이런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여 상품유통관계가 활발해졌다. 특히 대동법의 시행과 숙종4년부터 시작된 화폐의
시기에 맞추어 물을 논에 대주어야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리 시설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농민들이 제한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서로 돕는 마을 단위의 공동노동조직으로 주로 논농사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17세기 이래 이앙법과 쌀 ․ 보리 2작 농업기술 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