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와해 속에서 현대의 주사업이었던, 자동차, 중공업, 건설부분 역시 위기를 벗어 날 수 없었다.
무리한 대북사업과, 사업 확장으로 이미 현대의 몰락이 예기되고 있던 가운데, 정주영회장의 아들들, 즉 현대그룹의 오너들 간의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났던
현대그룹의 중심축이 건설, 자동차, 조선 등 전후방효과가 매우 큰 비용체감 산업인데다 , 둘째, 현대그룹이 이 부문에 진출할 무렵 이들 산업에 극히 유리한 방향으로 외부환경이 조성된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주영회장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재벌상속분쟁의 시사점과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켰다. 고
정주영이 창업주로서 조국 근대화 작업에 최선방에서 국가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주인이 없던 현대건설이 참 어렵게 주인을 맞이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건설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기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한편의 드라마가 연출됐다. 2010년 6월 채권단이
현대아산은 토지공사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지난 8월 그동안 대북사업을 이끌어 온 정몽헌회장의 자살로 대북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대북사업을 계속해야 하느냐, 한다면 누가 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그룹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정상영 금강고
현대 기업의 경영 하이라이트
1. 국내 최초 해외 건설시장 진출(1965)
정주영은ꡒ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을 길은 수출뿐이다ꡓ라며 1965년 국내 최초로 해외진출을 시도했다. 정주영이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에 응찰했을 때만 해도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