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기간에 발표의 주제였던 이광수, 김동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염상섭은 그러나 그들과는 완연히 다른 일생, 다른 유학생활 겪는다. 김동인처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나 김동인처럼 탐미주의로 흐르지도 않고, 이광수처럼 노골적인 친일을 하지도 않는다. 1921년 발표한 횡보(橫步)의 소설 「표
1. 탄생과 집안 배경
조선총독부 보존본인 염동준 발행의 파주 염씨 세보에 따르면 염상섭은 정유년 8월 3일(1897년 음력 8월 3일)에 서울 종로구 필운동 야조현 고가나무골에서 태어났다. 염상섭의 본명은 상섭(尙燮)이었고 그의 필명(筆名)은 상섭(想涉)이었으며 자(字)는 주상(周相), 호(號)는 횡보(橫步
진학문(秦學文)으로부터 동아일보에 입사하라는 편지가 왔고, 이것이 ‘기자 염상섭’의 출발이었다. 동아일보의 기자 활동과 함께 귀국 후에 동인지 「폐허」에 참여하였다. 횡보는 처음에 소설 뿐 아니라 시, 수필, 평론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이 많았고, 또 어느 분야든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
진학문 등 일본 유학생에 의해 소개된 해외 문학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발달에 역할이 컸을 것으로 유추된다. 특히, 1909-1911의 《소년》과 《태서문예신보》,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학지광》의 번역은 담당층인 몽몽, 진순성 등이 당시에 단편 소설을 창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향은 절대적인 것
진학문의 추천으로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경향신문》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63년 3월 14일 사망하였다. 1920년 7월 김억, 김찬영, 민태영,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