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남가단의 개념
최초로 ‘가단’이란 용어를 쓴 것은 조윤제의 《한국시가사망》 중 《경정산가단》의 기록이다. 조윤제는 말하기를
「김천택 김수장이 평민계급에서 돌출하야 시가계에 중진적 존재가 되니 그들을 중심하야 일세의 가인 가객이 바짝 일어나 경정산에 운집하야 일대의 성
한다.
이러한 시조의 형식적 전통은 고려 가요를 거슬러 향가에가지 소급되는데, 3장 6구는 고려 가요의 분장 형태에서, 종장의 첫 구 3자는 향가의 후렴구 ‘아으[阿耶]’의 형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2. 시조의 탄생
시조는 시가 문학의 한 갈래인 서정시이다. 문학 · 예술로서의 시조
한다는 온건파 사대부들과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급진파 사대부로 나누어 졌다. 결국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세력을 장악하면서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 이들은 권력과 토지를 차지하여 유리한 고지를 이미 점령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하는데, 이들 세력을 훈구파라 한다. 훈구파는
한시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국문시가에서는 호남가단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 세가 컸다. 조선조 때 남도가 한국시가문학의 중심지가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적 패배세력의 유배지로서의 역할이다. 정치적 바람을 맞은 학문과 지식이 높은 유배자들이 남도에 부처 되어 살았다. 가족과 멀리 떨
한 신진사류(또는 신흥사대부)에 의해 건국 되었다. 이들 신흥사대부들은 지방의 중소 지주층 또는 지방 향리 출신으로 농민에 기반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국가운영에 지도 이념의 사상으로 삼았다. 신흥사대부는 다시 이성계와 정도전, 이방원을 중심으로한 급진개화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