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한다. 이러한 사유가 가능한 것은 예술과 현실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한 덕분 아닐까. 그가 강조한 자아 각성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의 초기문학론이 보여주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많은 고민의 흔적들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좋은 지침이 될 것으로 믿는다.
1.5. 황석우와 현철의 논쟁
운동가들과 문인들과의 관계가 확인되고 있다. 초기 잡지들에서의 이들의 관계는 문학과 사상운동과의 미분화, 즉 문학 고유의 독립성 및 자율성에 대한 직업적 인식적 미분화가 첫 번째 원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는 근대시 형성의 제반 과정들이 보다 복잡한 관계 속에 놓여있었음을 반증하고
문제가 주로 취급되었다. 민중교화와 현실비판이라는 개화기 정신은 한시를 비롯한 가사, 시조, 민요, 잡가 등 전통자생시형이나 창가, 신체시 등 외래시형에 모두 공통되는 정신바탕이었던 것이다.
(1) 개화기 애국독립가
최제우의 <용담유사> 1860년대에 창작된 8편의 가사와 劍歌 한편이 전해지고
우리네 삶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거기에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제의 야욕은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한반도는 일제의 입맛에 맞춰 완전한 병참기지화를 위한 ‘민족말살정책’에 시름 앓았다. 본 연구는 1930년 <시문학>에 발표된 김영랑의 13편의 시 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박용만이 차지하는 위상을 무력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계략이었으나, 박용만은 한인사회를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박용만 제거공작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국민회를 주무르던 이승만이 1918년 2월 예산집행이 문제되어 문부조사를 받기에 이르자, 오히려 문부조사요원을 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