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생가 답사기
영랑생가는 동산 중턱 양지바른 쪽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에 본채와 사랑채가 널찍이 자리잡고 있다. 화단에는 방문객을 위함인지 그를 기리기 위함인지 모란꽃을 가득 심어 놓아 그 작위적 발상이 가상스러운데, 한쪽에는 1988년에 세운 영랑시비가 육중하고 촌스러운 자태
시절을 보냈으며 1909년에 강진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15년에는 졸업을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로 진학을 하지 못했다. 1916년 결혼을 하고 모친의 배려로 서울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최초의 비운인 아내와의 사별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 소재
영랑의 초기시의 소재는 대체로 자연과 '내 마음'으로서 이것은 그의 고향 강진과 한국 서정시의 소재전통과 연결된다. 그의 자연은 사회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내향성을 지닌 것으로 영원한 아름다움과 향수에 젖은 내 마음의 유미적 본향이다.
영랑은 후기시에서 「춘향」, 「독을 차고」,
Ⅰ. 개요
동․서양을 불문하고 버섯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기록이 있으나 기원전 2,000년경 지나본초학(支那本草學)의 시조인 염제신농(炎帝神農)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농업의 창시자로서 백초를 모아 그 약효를 스스로 검사하여 구분한 의약의 시조로 추앙 받고 있다. 버섯 이용
시문학》 창간호(1930년)
2) 해설
용아 박용철은 1930년대 우리 시사의 벽두를 장식한 『시문학』을 주재한 일과, 또 세칭 ‘기교주의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임화와의 논쟁으로 더 잘 알려진 시인이다. 김영랑 정지용 등 이른바 시문학파의 순수시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시문학 이론가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