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는 그 책을 수찬한 사람에 따라 관찬사서와 사찬사서로 나누어진다. 관찬사서란 왕명에 의하여 국가적 사업으로 씌어진 것으로, 이는 개인적인 동기에 의하여 개인이 쓴 사찬사서에 비하여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다. 먼저 체재가 전형적인 역사 서술법을 따른다. 따라서 체재적인 면에서의 균형
동국사략』은 『동국통감』의 1/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간략한 통사이지만, 내용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책은 통일신라 이후부터 비로소 왕을 단위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통일신라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심지를 한반도에 비정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신라 중
조선 왕조 창업 후 유교적 강상 확립을 통해 왕권 강화를 추구했던 예학의 대가인 성리학자였다. 그는 이미 그의 저술 『동국사략』에서 성리학적 가치관에 입각해 고대 삼국의 역사를 재해석했던 것이다. 그의 삼국역사에 대한 비판의식은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보다 훨씬 강했다. 유교적 강
동국사략
◎성리학적 명분론을 깊이 투영한 사서
불교·신화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 삼국의 역사를 신라 위주로 서술
사찬(私撰)인 『동국사략』은 관찬(官撰)인 『동국통감』과 달리,고려말기 조선왕조 건국과정에 이성계를 도와 혁명을 주도한 개국공신들의 출신과 인격을 비판하고,
동국통감』편찬에 앞서 고대사 부분만을 다룬『삼국사절요』를 편찬하게 된 배경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럴 때 세조가 불만을 가졌던 역사서는『삼국사기』와『동국사략』이었음에 틀림없다.『삼국사기』는 삼국이전의 상고사를 소홀히 다루었다는 결점이 있고, 또『동국사략』은 유교적 명분사관